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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및 문간채 건물지 일원 전경)

1. 발굴조사 개요


가. 발굴조사 경위

-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115-1번지의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명승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역임

- 조사지역은 남측에 연못이 위치하고 그 북측에 사랑채 건물의 기단과 초석이 남아있음

- 사랑채 건물지 북측에는 배드민턴 연습장으로 이용되었던 안채터로 추정되는 지역이 빈 터로 있는 상태였음

- 인근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 ‘월암(月巖)’ 각자(刻字) 바위가 위치함

- 조사지역은 아직도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조선시대 별서(別墅)가 있었던 곳으로, 

- 종로구에서는 이 일원을 정비하고자, 유적 정비에 앞서 그 기초자료 등을 확보하기 위해서 발굴조사를 실시함


나. 조사 지역

- 조선시대 별서(別墅)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 조사지역 남측에는 연못이 있고 

- 연못 남측에는 육각정이 위치해 있음

- 연못 북측에는 사랑채 건물터 그리고 그 뒤 북측에 안채터가 위치

- 따라서, 안채터 추정지역, 사랑채지역, 연못지역 등으로 나누어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 각 유구의 성격, 규모 등을 조사하고자 함


다. 조사 방법

- 연못 남측에는 육각정 건물지가 잘 남아 있으므로 이에 대한 원 위치 여부와

- 연못 둘레에 조성되어있는 석축의 깊이 등 현황을 파악하고 그 주변에 피트를 설정하여 조사하였으며

- 입수구와 출수구를 확인하기 위하여 추정지역 일원에 피트를 설정하여 조사함

사랑채 건물지는 기단석과 초석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부분적으로 피트를 설정하여 원 위치의 여부 및 내부시설 등을 확인하였으며, 

- 조사지역 북측의 안채터로 추정되는 지역은 10m 그리드를 설정하여 먼저 시굴조사를 실시한 후 

- 유구의 노출 양상에 따라서 전면 발굴조사를 실시

- 건물지 및 연못 주변 일대에는 시굴갱(트렌치)을 설정하여 담장지 등의 부속시설과 전체 영역을 파악할 수 있는 유구가 잔존하는지 확인함


2. 조사지역 환경


가. 지명유래 

- 종로구 부암동에 있던 마을로서, 부암동 115 및 115-1번지에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

- 일명 백석실(白石室)이라고도 하는데 흰 돌이 많고 1급수가 흐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임

- 백석동이라는 명칭은 이전에도 자연동으로 존재했을가능성이 높지만, 행정구역 명칭으로 사용된 것은 1894년으로 추정

- 백석동을 포함한 부암동은 자문밖(자하문밖)이라 하여 조선조 때에는 외진 산골이었으며 죄인들을 처형해 버렸던 곳


나. 백석동천(白石洞天)의 의미

- 백석(白石) 

 ▶ 백석은 흰 바위라는 뜻으로, 중국에는 명산인 백석산이 있는데, 그 산에도 경치가 뛰어나게 수려한 백석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됨

 ▶ 대상지의 바위 경관이 뛰어나게 아름다워 중국의 백석산에 비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백악산 후록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백악(白岳)’에서 ‘백석(白石)’의 의미로 볼 수 있음

 ▶ 백석동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흰 돌이 많은 지역이란 의미로 볼 수 있음


- 동천(洞天) 

 ▶ 동천의 사전적 의미는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들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경치가 있는 곳에는 동천이라고 붙인 예가 곳곳에서 발견됨

 ▶ 동천이 새겨진 각자는 청린동천(靑麟洞天)과 청계동천(靑溪洞天), 쌍류동천(雙流洞天), 제일동천(第一洞天), 복호동천(伏虎洞天), 벽운동천(碧雲洞天) 등 이 있음

 ▶ 청린동천(靑麟洞天)은 종로구 가회동 1-5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회동은 예부터 길지로 지명에 나타나 있음. 

 ▶ 그래서 청린(靑麟)으로 이름한 것으로 보임

 ▶ 청린(靑麟)은 상서로운 동물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상상의 동물

 ▶ 청계동천(靑溪洞天)은 종로구 부암동 322-6번지 무계정사 내에 위치하고 있으나 현재는 개발로 인해 주변 경관이 훼손되었고, 암각만이 존재


- 따라서, ‘백석동천’의 각자는 백악산에 위치한 바위가 아름다운 동네, 흰 돌이 많은 아름다운 동네라는 의미로 해석됨


다.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

- 1967년 서울특별시사편찬회에서 간행한 '동명연혁고(洞名沿革攷)'에 따르면 백석동은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 부암동을 이루는 자연부락 가운데 하나라고 전하고 있음

- 또한 이 기록에는 백석동천 유적이 1830년대 지어진 600여 평의 별장이었으며 

- 안채는 4량(樑)의 집이며 1917년경 집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를 하여1967년경까지 내려왔었다고 함

- 사랑채는 ‘ㄱ’자 5량(樑)집으로 기둥이 굵고 누마루가 높았으나 1970년경에 허물어 졌다고 하며 

- 연못의 정자는 한국전쟁 때 없어졌다고 함 

- '동명연혁고'의 내용과 같이 1830년대 지어졌다고 하는 별장의 유래와 원소유자를 사료 상으로는 현재 확인되지 않음


라. 백석동천 각자바위

- ‘백석동천’ 각자바위는 백석동천으로 접근하는 진입로에 위치

- 백석동천 각자바위로 인해 이 일대 지역은 백석동으로 불리움

- 백석동천 각자는 바위에 글 새길 부분이 직사각형(215×67cm) 형태로 편액과 같이 다듬고 ‘白石洞天’이라고 음각

- 글자 크기는 대략 50(가로)×55(세로)×5(깊이)cm이고, 음각된 글자 부분에는 주칠한 흔적이 남아 있음

- 각법은 마름모꼴 각법을 사용

- 각법의 수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 각석으로 분류해 볼 수 있음

백석동천 각자바위에서 별서 유적은 조망할 수 없음

다만 백석동천 각자바위 전면에 위치한 갈림길을 따라 가면 한쪽 길은 별서유적으로, 

- 다른 한쪽 길은 능금마을로 통함


(백석동천 각자바위 전경)


(백석동천 각자바위 전경)


3. 조사내용

  

(안채, 문간채, 사랑채 건물지 전경)


. 안채 및 문간채

안채터 추정지역은 사랑채 건물지 북측에 위치하고 조사 전 까지 배드민턴장으로 이용되었던 

- 이 지역에서는 건물지 2동과 마당 그리고 마당 서측에서 2단의 대() 등의 부속시설이 확인됨

- 확인된 건물지는 남향을 하고 있는 ‘ㄱ’자 건물지와 그 남측에서 동서방향으로 길게 일자에 가까운 ‘ㄹ’ 형태의 건물지

- 이 중에 ‘ㄱ’자 건물지가 안채로 판단되고

- 그 남측의 ‘ㄹ’ 형태 건물지가 문간채로 판단되는데

- 안채의 전체적인 모습은 서측이 트인 ‘ㄷ’자 형태임

- 안채와 문간채가 감싸고 있는 중앙은 마당공간이고

- 마당의 서측에는 남북방향으로 높이가 약 1.5m 내외인 축대가 위치하고 

- 축대 상부에서는 담장지 석열이 확인됨

장독대로 추정되는 2단의 대가 확인

- 마당 중앙에서 남서측으로 암거형 배수시설이 노출

- 안채 건물지의 전면에는 기단석이 비교적 온전하게 잔존해 있었고 그 내부 공간에서는 온돌시설이 서측과 동측 칸에서 각각 확인

- 북측과 동측의 후면부는 유구층이 지표에서 약 10cm하부에서 확인되어 많이 유실된 상태

문간채 건물지는 중앙에 안채로 진입하는 대문 1칸을 두었고 

- 대문칸을 중심으로 동측에는 마루, 서측에는 온돌방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 서측 끝칸에서 뒷간(화장실)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되어 주목되었음


(안채, 문간채 건물지 전경)


(안채 건물지 전경)


(문간채 건물지 전경)


(안채 건물지 전경, ~)


(안채 건물지 전경, 남동~북서)


(문간채 뒷간 배변시설)


(문간채 서측 부엌, 온돌방 전경)


. 사랑채

- 문간채 남측에 위치하는 사랑채 건물지는 조사 전 북측 후면 기단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기단과 초석이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음

- 따라서 발굴조사는 기초시설과 온돌 등 건물지의 내부 시설을 중점적으로 확인하는 것으로 조사를 실시

사랑채 건물지는 남향을 하는 동서방향 정면 4칸에 서측 끝칸에서 남측으로 2칸을 덧붙인 ‘ㄱ’자 형태의 건물지

- 주칸 거리는 초석의 중심을 기준으로 정면은 서측에서 동측으로 3.66m(1.83m+1.83m), 2.44m, 2.44m, 2.39m로 전체 길이는 10.94m

- 측면은 서측면이 북측에서 남측으로 2.42m, 2.41m, 2.47m, 2.38m(누마루)로 전체 길이는 9.73m

- 동측면은 북측에서 남측으로 2.42m, 2.41m로 전체 길이는 4.83m

- 기둥자리에는 초석이 모두 잔존해 있는데, 형태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사다리형 초석으로 상면과 측면은 정다듬

- 남서측 끝 1칸은 누마루로 5개의 초석 모두 장주초석

내부 공간은 중앙 2칸은 내부에서 특별한 시설이 확인되지 않아서 마루를 깐 대청으로 판단되며 

- 그 전면 퇴칸에도 툇마루를 깔아 대청을 확장했던 것으로 판단

- 대청의 동측과 서측은 온돌방을 구성하였는데, 그 내부에서 각각 구들시설의 흔적이 확인

- 동측의 온돌방은 남측에 함실아궁이를 두었고, 북측에는 동서방향으로 개자리가 양호하게 노

- 고래둑은 유실되어 확인되지 않음

- 배연은 동측기단 하부에 근대에 시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토관이 노출되어 동측 온돌방의 배연은 사랑채 동측 측면으로 한 것으로 추정

동측의 남북방향으로 축대에는 벽돌로 조성한 굴뚝도 확인되었음

- 서측의 온돌방은 남측에 함실아궁이를 두었고 벽돌로 부뚜막을 시설한 흔적도 확인됨

- 서측의 온돌방은 남측 반 칸까지를 온돌방으로 구성하였고 내부의 고래둑은 모두 유실된 상태

- 북측에 동서방향으로 조성한 개자리가 일부 노출

- 서측 온돌방의 배연은 북측으로 하였고 사랑채 후면 기단 북측에는 굴뚝시설도 확인됨

- 사랑채 남동측에서는 방형의 석축이 확인되었는데 방지(方池)로 추정


(사랑채 건물지 전경 1)


(사랑채 건물지 전경 2)


(사랑채 서측 누마루, 부엌, 온돌방 전경)

(사랑채 동측 온돌방 전경)


(사랑채 건물지 일원 전경)

다. 연못 및 육각정

연못 조사는 육각정 건물지의 중심을 기준으로 남북 시굴갱을 설정하여 연못 내부의 퇴적 양상을 확인하는 것

- 조사결과 연못 내부에서는 특별한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고 바닥에 퇴적된 퇴적층만 확인

연못의 출수구는 연못 서측에 위치해 있었고 입수구는 연못 석축을 따라 제토하면서 조사하였으나 발견되지 않음

- 육각정 건물지는 기존에 초석이 노출되어 있어 기초부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갱 조사를 실시

- 조사결과 연못 외측은 지반이 약해 잡석을 지정한 후 건물을 조성

- 내부에는 초석 안쪽으로 토사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해 박석을 설치


(육각정 건물지 전경)

(1935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2면 왼쪽 상단에 실린 백석동천 정자의 모습)


라. 유물

- 출토 유물에 대한 설명은 생략


4. 고찰


- 별서정원이란 별장형(別莊型)과, 별업형(別業型)을 포함하는, 저택에서 떨어진 인접한 경승지나 전원지에 은둔과 은일 또는 순수히 자연과의 관례를 즐기기 위해 조성하여 놓은 제2의 주택개념이라 할 수 있음

- 별장형 별서란 서울⋅경기의 세도가가 조성해 놓은 정원으로서 대개 살림채, 안채, 창고 등의 기본적인 살림의 규모를 갖춤

-  또한 은일, 은둔형의 지방의 별서도 크게는 별장형의 별서라 볼 수 있음

- 별업형의 별서란 효도하기 위한 것으로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농소부락의 조석루정원의 경우처럼 살림집을 겸하는 경우가 많음


-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 유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115-1번지 일원의 백석동천계류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음

- 금번 발굴조사 결과 안채, 문간채, 사랑채(舍廊軒), 육각정(六角亭) 건물지 등 총 4개소의 건물지와 이와 관련된 부속시설인 축대, 담장지, 방지, 연못 등이 확인됨

- 확인된 유구를 통해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 유적의 원형을 추정해 보면 아래의 배치도와 같음


(추정 배치도)


5. 맺음말


- 금번 발굴조사를 통해서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 유적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을 확인할 수 있었음

- 자연 산 속의 그리 깊지 않은 곳, 남측에서 북측으로 흐르는 계류의 동측 상단에 산, 바위 그리고 물 등 자연의 풍류를 느끼면서 상당 기간 섭생도 할 수 있는 별서를 조성함

- 계류 동측 산기슭 하단을 정지하여 서측에 축대를 쌓고 

- 동측에 석축을 쌓아 남북방향으로 긴 대지를 조성하여 가장 북측에 안채를 두고 

- 그 남측에 문간채를 두었으며 

- 가장 남측 주변 경관이 가장 잘 조망되는 곳에 사랑채를 배치

- 그리고 그 남측 아래에는 계류에 붙여 연못과 육각정을 조성

- 출토된 유물 등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1800년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

- 발굴조사 결과 하부에서 자연층만이 확인되었고 그 이전의 문화층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 1800년대 후반에 건립되어 근래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됨

- 근래에는 적벽돌을 사용하여 난방시설 등을 개축한 듯한데 

- 전체적인 배치나 건물의 평면은 그대로 사용한 듯함

- 따라서 유적에 대한 전체적인 정비나 복원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판단됨

- 하지만, 복원에 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와 검토가 필요함


(사랑채 건물지 복토 후 전경, 현재 모습)

지도 상 위치



PS.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2012년)이 필요할 경우, 비밀댓글로 메일주소를 남기시면 송부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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